티스토리 뷰

목차


    화나면 쌀 한 가마니 마당에 뿌리고, 엄마는 울면서 쓸어 담고.

    우리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92세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70년 넘게 한결같이 고집스럽고 가부장적이셨던 친정아버지.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는 말, 적어도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92세, 죽어도 안 변한 것

    어릴 적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아버지는 늘 집안의 절대 권력이자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거나 성이 나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집안은 정적이 흘렀습니다. 누구 하나 소리도 못 내고 숨죽여 아버지 눈치 보기 바빴습니다. 어느 날 무슨 일로 그리 화가 나셨는지, 마당 한가운데에 멀쩡한 쌀 한 가마니를 통째로 냅다 던져 뿌려버리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얗게 흩뿌려진 쌀알들 사이에서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아 크게 소리도 못 내시고 울면서, 그 쌀을 한 알 한 알 쓸어 담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무시하고 윽박지르며 울리기를 70년입니다. 세월이 흘러 80이 넘고 90이 넘으면 사람 마음도 좀 순해지고 미안한 감정도 생길 법한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똑같으셨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은 아집이 되었고, 당신의 생각이 곧 세상의 법이자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변에서는 '연세가 드셔서 그렇다'고 이해하려 했지만, 딸들 눈에는 그저 평생을 이어온 그 지독한 이기심과 가부장적인 태도가 나이라는 핑계 뒤에 더 견고해진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평생 당신 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든 엄마에게 사과 한마디,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문장 남기지 않은 채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며 딸들끼리 모여 앉아 "우리 아버지는 진짜 참 양심도 없다", "어쩜 저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버리시냐" 하며 참았던 씁쓸함과 서러움을 토해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철이 들거나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92세로 떠나신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온몸으로 증명하고 가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엄마가 잘 주무시는 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슬픈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집안에 같이 계실 때는 늘 '언제 영감님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또 무슨 일로 성을 내며 소리를 지르실까' 싶어 밤마다 안절부절못하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일상 자체가 늘 나지막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나날이었던 셈이지요. 평생을 불같은 아버지를 모시며 숨죽여 살아온 엄마의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미어져옵니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히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엄마는 잠을 참 잘 주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평생을 괴롭히던 불면증과 불안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 그동안 못 다 주무신 잠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많이 주무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참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프던지요. 그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편히 주무시는 엄마를 보며 딸들의 가슴은 또 한 번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딸들이 보기엔 시골집에 혼자 계시는 엄마가 적적하고 외로울 것 같아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함께 살자"고 몇 번이고 모시려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시며 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평생 누군가의 불호령과 눈치를 보며 살아오셨는데,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당신만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간을 찾으신 겁니다. 비록 시골에서 혼자 지내시지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언제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지금의 시골집이 가장 편하고 좋다고 하십니다.

     

     

     

    분노에 쌀을 마당에 쏟아버린 뒤, 눈물 흘리며 흩어진 쌀을 주워 담는 어머니와 뒤에서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대비되어 평생 이어진 가부장적 상처와 슬픔을 담은 장면.

    60~70대, 다름이 아니라 틀렸다가 되는 나이

    아버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아집으로 변하고, 당신만의 경험과 생각이 마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자 유일한 상식처럼 되어버리는 분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60대, 70대에 접어든 분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어릴 적 보던 모습 그대로 똑같은 이유로 소리를 지르고, 똑같은 재료로 다투며 내가 잘났다고 고집을 부리곤 하십니다. 마치 자신만의 단단하고 견고한 성을 쌓아두고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며 문을 닫아걸어 놓은 것만 같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인정을 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참 답답해집니다.

    하지만 남 이야기를 할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문득 제 모습을 돌아보니, 저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고집불통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적이 있었더군요. 내 경험이 전부인 양 굴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은연중에 상대를 틀렸다고 판단해 버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주변을 보며 '아, 나이 먹는다고 저절로 철드는 게 아니구나. 나도 저렇게 늙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 요즘은 정말 안 하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면 내 고집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잠시 멈추고,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한 번 더 생각해 보려 노력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조금 다잡고 상대방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과 큰 충돌 없이 원만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견고한 성을 쌓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한 걸음 더 이해해 주는 부드러움이 진짜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